벌써 저기에서 그녀가 날 왜 어이없이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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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Books & Music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마디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ㄱ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신경정신과 의사의 자전적 수기.
아우슈비츠에 대한 유대인으로서의 분노가 아니라
정말 끝장에 처한 인간 군상과 본인 스스로를 학자로서 분석한 내용이 특징이다.

원제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Men's searching for Meaning)인데
사실 작가가 창안안 로고테라피에 대한 내용이 뒤에 나오는걸 감안하면
이게 더 적절한 제목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수용소 생활이라는 눈에 띄는 소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저런 제목을 택한것 같다.



요즘은 신경 질환보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옛날 같으면 정신과 의사 대신
목사와 신부, 랍비를 찾아갔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성직자에게 가지 않고, 의사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묻는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존에도 안네의 일기를 필두로 2차대전때 독일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살았는지, 심지어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수많은 서책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희생의 크기나 이런것은 적지 않았고
오로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만 책의 전반부 6할을 할애했다.

이후 4할가량은 이 경험에서 작가가 창안한 로고테라피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특히 눈에 띄었던 점은 역자의 역량이었다.

전반부의 이야기와 달리 후반부의 이야기는 정신과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서적에 준할 정도의 깔끔한 번역을 보여줬다.
(찾아보니 역자는 경북의대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 
강북삼성병원장을 역임하신 분이셨다.. 어쩐지.. )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후반부 4할은 사실 심리학이나 정신과학에 관심이 없다면 꽤나 어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초반의 수용소 이야기만 하더라도 느끼는 점이 굉장히 많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양이 많은 책도 아니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